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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긴급취재] 마등령 아래 평범한 산길에서 눈사태 사망사고 발생

by 날라리 산행이야기 201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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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마등령 아래 평범한 산길에서 눈사태 사망사고 발생
 
등산학교 강사 김종구씨 사망·주성환씨 실종
후속 눈사태 위험으로 수색 중단…공룡릉 조난자는 구조


3월1일 설악산에서 눈사태가 발생, 2명이 매몰되었으며 이 중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은 실종되었다. 이들은 서울 뫼우리산악회 소속 회원 3명으로 27일 설악골에 입산, 천화대 리지 범봉과 마등령을 거쳐 비선대로 하산 도중 눈사태를 맞았다.

사고 지점은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내려서는 등산로상 제2쉼터라 불리는 샘터 부근이다. 사고자 김종구(53·철수와영이등산학교 대표강사)씨의 시신은 3일 사고지점에서 1km 떨어진 계곡에서 발견되었으나 주성환(47)씨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 (좌)구조대원들이 원골에서 탐침으로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다. (우)헬기로 김종구씨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3월 2일 오전 9시경 119상황실에 설악산으로부터 구조요청을 해온 사람은 이들이 아니라 공룡릉에서 조난당한 등산객 3명이었다. 바로 구조대가 꾸려졌고 1m 이상의 폭설이 온 상태였기에 21명의 구조대원이 출동했다. 국립공원설악산사무소 재난구조대를 비롯, 한국산악회구조대·적십자구조대·119구조대원들로 연합해 구조팀이 꾸려졌다.

구조대는 폭설로 등산로가 막혀 헬기로 구조하려 했으나 악천후로 이륙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비선대에서 마등령으로 러셀해 오르던 구조대는 16시39분 제2쉼터 샘터에서 눈사태 생존자 장영태(39·뫼우리산악회)씨를 발견했다. 당시 장씨는 휴대전화가 없어 구조요청을 못하고 현장에서 타프를 치고 비박 중이었다. 구조대가 공룡능선 조난자들을 구조하러 가는 과정에서 그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구조대는 3개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공룡능선 조난자를 구조하러 가고 한 팀은 생존자 장영태씨를 데리고 하산하는 한편 나머지 한 팀은 실종자 수색을 했다.
공룡릉 조난자 구조팀은 적설량이 많은 데다 길이 가팔라 현장 접근에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22시40분 공룡능선에서 조난자 3명을 발견, 민간구조대원들과 함께 하산했다.

그후 마등령 사고 현장에는 8명의 구조대원이 남아 다음 날 수색을 위해 비박했다. 3월 3일 날이 밝자 관리공단과 119구조대는 추가로 수색 인원을 투입, 대규모 수색에 나섰다. 그 결과 실종자의 배낭을 발견한 데 이어 11시20분 김종구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발견 지점은 원골 상류로, 사고 발생지점에서 1km나 떨어진 곳이었다.

▲ 구조대원들이 김종구씨의 시신을 발견해 수습하고 있다.

사고 발생지점 1km 아래에서 시신 발견

▲ (위)생전의 김종구씨. 뫼우리산악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철수와영이등산학교 대표강사다. (아래)생전의 주성환씨. 골수 바위꾼으로 등반사진을 즐겨 찍었다고 한다.
오후로 접어들며 민간구조대원 17명을 추가로 투입, 수색에 박차를 가했지만 15시경 기상이 악화되며 추가 눈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커져, 일부 대원이 남아 비박하고 철수했다. 그후 관리공단과 민간구조대, 119대원으로 구성된 사고대책반은 악천후로 인한 수색 중단을 거듭하다가 결국 구조대원들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 잠정적으로 수색을 중단했다.

당시 구조작업을 지휘한 관리공단 이동규 팀장은 “공단 근무 30년에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었다”며 “계곡에서 6m 탐침으로 수색을 해도 탐침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관리공단과 119, 민간구조대는 기상이 안정되고 추가 눈사태의 위험이 없어지면 최대 인력을 동원하여 더 광범위하게 수색한다는 방침이다.

2월 말~3월 초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공룡능선 조난자인 김모(40)씨의 당시 상황 설명은 이렇다.  

“2월 27일 저녁 비선대에서 1박 하고 28일 아침 산행을 시작했다. 당시 등산로는 통제된 상태가 아니었고, 희운각대피소에는 등산객도 많았다. 희운각에서 중청대피소로 가려 했으나 러셀이 안 되어 있기에, 하루쯤 비박한다는 생각으로 공룡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당시 공룡능선은 앞서 지나간 이들로 러셀이 되어 있었다. 오후 5시쯤 ‘마등령 4km’ 이정표가 있는 곳에 도착, 비박했다. 저녁 9~10시쯤 텐트 안에 있는데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주변을 맴도는 게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사고자들 발자국 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때까지만 해도 산행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다음 날인 3월 1일 아침, 얘기가 달라졌다. 일어나니 엄청난 눈이 쌓여 있었다. 싸락눈인 줄만 알았지, 그렇게 큰눈이 내릴 줄은 몰랐다.”

눈이 허리까지 빠져 진행하기도 어렵고 화이트 아웃으로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하루 더 비박했고, 3월 2일 아침 식량이 떨어져 비등산로인 계곡으로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119에 구조요청을 했다. 그 후 그는 비선대산장의 지인과 통화해 더 큰 사고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생존자는 철계단 난간에 다리가 걸려 살았는데 다리를 다쳐 30시간 이상을 고립된 채 스스로 부목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휴대전화를 차에 두고 왔다고 했어요. 우리가 산행을 시작할 때도 눈이 쌓여 있었지만, 그때는 다져져서 굳은 얼음 같은 상태였죠. 그런데 거기에 신설이 내렸고, 그게 쏟아져 눈사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위쪽 가파른 곳이면 어디든 눈사태 위험

▲ (좌)눈사태가 발생한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내려서는 길의 샘터 부근. (우)구조대가 생존자 장영태씨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는 타프를 치고 비박 중이었다.

마등령 아래에서 사고를 당한 뫼우리산악회 회원들은 2월 26일 저녁 9시 서울에서 출발, 27일 새벽 5시 산행을 시작했다. 이들은 천화대 리지를 등반, 범봉에서 비박하고 28일 공룡능선을 거쳐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 2차 비박을 했다. 그 다음 날인 3월 1일 비선대로 하산 도중 오전 11시쯤 샘터를 지나다 눈사태로 2명이 실종되었다.

설악산사무소 이동규 팀장은 “1차 눈사태에는 3명이 모두 무사했으나 뒤이은 2차 눈사태에 사고자들이 등산로 난간에서 떠밀려 갔다”고 생존자 장영태씨의 증언을 전했다. 생존자 장영태씨는 휴대폰이 없었고 다리를 다친 상태였기에 타프를 치고 비박했으며, 사고 다음 날인 3월 2일 공룡능선으로 출동 중이던 구조대에 발견되었다.

이들의 원래 계획은 남교리~서북능선~공룡능선~백담사 코스였으나 설악골~천화대 리지~잦은바위골~비선대로 변경했다. 그러나 적설량이 많아 비등산로인 잦은바위골을 포기하고 마등령 쪽으로 코스를 변경해서 산행 도중 눈사태를 만났다. 

지난해 1월에도 염주골 눈사태로 산악인 김형주씨가 사망했으나, 계곡 아닌 능선 사면의 등산로에서 눈사태 사망사고가 나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적설량이 기록적으로 많았다. 이렇게 적설량이 많은 경우에는 등산로라고 해도 위쪽의 산세가 가파르면 어디든 눈사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이동규 팀장의 얘기다.

눈사태로 사망한 고(故) 김종구씨는 ‘철수와영이등산학교’ 대표강사로 열린캠프등산학교 강사를 역임했으며 뫼우리산악회 회장도 지냈다. 캐나디언 로키(1996), 요세미티(1997), 매킨리(2005)를 등반한 베테랑 산악인이며 교육학 박사다. 그는 “성인 교육에 있어서는 선생과 제자도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협의와 소통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늘 강조했다.

고 주성환씨는 소위 말하는 골수 바위꾼으로 수락산 코끼리바위(아제길, 뫼길, 우리길, 산패길)를 개척했으며 삼성산 BAC암장 개척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산악회 최준근 총무는 그에 대해 “산악회 활동에 헌신적이었으며 후배들을 많이 키워냈다”고 전한다. 또한 “등반사진 찍기를 즐겨 등반 후 항상 회원들의 사진을 정리해 까페에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베테랑 산악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불의의 눈사태로 목숨을 잃은 데 대해 산악인들은 안타까워했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사무소 , 뫼우리산악회
출처 : 거창할매집
글쓴이 : 어탕국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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